씀/일기

냉장고

알 수 없는 사용자 2010. 3. 20. 00:41


  결혼 30일전, 남자친구 혼자 먼저 들어가 사는 신혼집에서 저녁을 하려고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면서 냉장고를 바라보니, 엄마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 지더라. 부모님 도움 받지 않으려고, 있는 돈에서 집이며 살림이며 준비하려고 이것 저것 생략하려던 막내딸이 안쓰러웠던지, 가전이랑 가구는 사주마하시며 같이 매장을 돌며 사들인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냉장고였다. 그냥 보기 좋은 거만 찾는 살림을 살아보지 않은 나와 달리, 삼심년이 넘게 살림을 한 엄마는, 모양보다, 많은 기능보다, 사용하는데 불편함이 없는 물건을 꼼꼼히도 골라주셨다. 작은 집에서 살림을 시작하는 나는, 거추장 스럽게 장농을 놓고 싶지도 않고, 화장대도 놓지 않고 그냥 정말 간소하게 챙기고 시작하려고 했었다. 그게 맘에 걸리셨던지 왜 신혼 살림을 자취방처럼 해놓고 살라고 하냐며 장농이며, 화장대며, 책상이며 당신께서 장애인요양사로 일하시며 알뜰히 모으신 돈으로 살림을 정성껏 준비해주셨다. 해드린거 없이 받는거 같기만 해서 괜히 툴툴 거리고 싫은 소리도 하고 그랬는데, 그래도 엄마가 해주신대로 갖춰놓고 보니, 제법 신혼집처럼 아기자기하고, 예쁘게 꾸며졌다. 그렇게 산 물건 중 하나가 냉장고다. 작은 집에 양문형 냉장고가 왠말이냐며, 공간을 넓게 쓰고 싶었던 나는 그냥 작은 냉장고 하나 간단히 들일 생각이었다. 그런 내 행동에 브레이크를 건 사람은 바로 엄마. 가전이며 가구는 10년 20년 보고 사야한다고. 2-3년 후에 집 넓혀 갈때 냉장고 버리고 새로 살거냐며, 지금 조금 커서 부담되더다로 나중보고 사라며 양문형 냉장고들 사주셨다. 역시나 지금은 너무나 고맙게 잘 쓰고 있다. 그런데 오늘 문득, 비빔국수를 하려고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다 보니 사위 챙겨주라고, 밥처럼 해먹고 있으라며 김치에 꼬막, 깻잎, 멸치 등 간단한 반찬들과 국거리 소고기, 된장, 갖은 양념들, 손수 까서 담아주신 마늘 한 통, 힘들게 내리신 매실 액기스까지 냉장고에 들어있는 음식 중 엄마 손을 안탄게 거의 없었다. 30년을 밥해먹이고 키운 딸이 시집가서 살림살이를 해야 하는 누군가의 아내며 며느리가 되는 것이 그렇게 가슴이 아프셨던가. 뭐가 그리 속상하고 마음 쓰이는 게 많으신지 요즘 유독 잔소리가 많아진 엄마한테 나는 그새 고마운 마음은 또 저멀리 보내버리고 괜한 노파심이라며 귀찮아 하고 퉁퉁거렸던게 냉장고 문 앞에서 떠올랐다.
  지난 설, 작은 예단비에 더불어 20년 동안 쓰셨다는 냉장고를 바꿔드렸다. 우리 신혼 살림으로 산 냉장고와 똑같은 모델로. 냉장고 사드리면서 마음이 좋았다. 며느리 역할 했다는 보람도 들었고,  좋아하시는 어머님 모습 보며 무척이나 잘했다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엄마도 오랫동안 냉장고를 못바꾸신채 쓰고 계신다는 점을 깨달았다. 냉장고에서 소리가 나서 A/S도 부르고, 전선에 이상이 생겨 힘들게 고쳐가며 쓰셨었는데, 난 딸이면서도 왜 엄마는 미처 생각지 못했을까 가슴이 저려왔다. 결혼을 준비하면서, 이제 내 살림 살 생각에 신나기만 했지, 딸을 떠나보내야 하는 부모님의 마음을 조금도 헤아리지 못한 내가 참 아직 어리구나 싶었다. 그리고 며칠 간간히 남자친구 저녁을 챙겨주면서, 아 이제 시작인가, 살림을 산다는 거 만만치 않구나 싶기도 했다. 그런 살림을 30여년 살아온 당신이기에 딸이 이제 그 힘든 길을 가야 한다는 게 그리 속상하셨던걸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고 보니, 엄마 고생한거 뻔히 알면서도 자식은 이기적이서인지 내가 힘든것만, 나 즐거운 것만 생각하고, 엄마 아프다 소리엔 깊이 마음 못써드린 게 얼마나 속상한지 모른다. 결혼을 한달 앞두고 나니, 왜 그렇게 딸이 시집가는 걸 서운해하셨는지, 속상해하셨는지 아주 조금 알것도 같다. 그리고 나는 아들만 낳아야 겠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서 누군가의 아내로 사는 것, 엄마로 사는 것은 참 어렵고 많이 가슴 아파야 하는 역할 인거 같다. 혹시 내가 나중에 딸을 낳게 된다면, 엄마가 내 딸로 태어났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돈 때문에 비록 한두달이라도 고아원에 맡겨 외롭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고, 어린 손에 거친 구두 가죽을 손에 쥐고 바느질을 시키지도 않을 것이고, 학교를 중간에 그만두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돼지키우는 집에, 농사 짓는 집에 시집 보내 평생을 근육통에 시달리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돌아오는 엄마 생신때는 냉장고를 바꿔드려야겠다.